[서울] 6주차 수술 2일차 상세후기(긴 글 주의)
안녕하세요. 이 곳에서 도움받은만큼, 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후기 남깁니다.
1.신상정보/연애와 결혼에 대한 평소 생각
저는 30대 초반이고, 남자친구는 30대 초중반이에요. 만난지 만 4년이고 만 4년동안 쭉 동거해왔습니다. 만나자마자 같이 살기 시작했는데, 직장과 경제적인 이유로 별 고민없이 생활이 합쳐진 케이스고요. 서로 배려하며 문제없이 잘 살고있었습니다.
나이도 있고 같이 사는 것도 맞으니 결혼도 생각했으리라 보실 수도 있는데요. 남들이 보기엔 이미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저희는 결혼제도에 묶이고 싶지 않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상하게 보실 수도 있는데요. 독립된 개인으로서 일과 생활 등을 원가정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저희에게는 정서적으로 큰 안정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둘 다 사고방식이 유연하고 개방적인 편입니다. 남자친구와 이 주제로 구체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저는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에도 전적으로 동의해왔고요. SNS 상의 낙태죄 해시태그 운동을 팔로업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이라는 마음의 준비를 해왔던 것 같습니다.
2.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마지막 생리는 2월 초로 기억하고요. 평소 생리주기가 불규칙해서 조금 늦어져도 크게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피임은 콘돔으로 해왔고요. 생리가 너무 늦어지면 임테기를 했고 늘 음성이었습니다. 이번에는 3월 초에 생리를 해야 했지만, 조금 늦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고요. 3월 2주차에 코로나에 확진되면서 많이 아팠기 때문에 코로나때문에 늦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코로나라도 한 달이나 늦어지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되어 3월 28일에 임테기를 해보니 선명하게 두 줄이 나왔습니다.
임테기는 유통기한이 약 5개월 지난 것이었고, 첫 소변도 아니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샤워를 하러 들어가서 바로 테스트를 한 거라, 머리가 하얘진 채로 일단 씻었습니다.
씻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는데요. 가장 크게는 위의 조건(유통기한, 첫소변x)으로 결과값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과 만일 임신이더라도 낳아서 기를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남자친구는 장기휴가, 저는 휴직기라 집에 같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가서 임테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남자친구는 너무 놀라며 당황했고, 저는 정신 차리라고 했습니다. ‘멘탈챙기고 일단 병원으로 가서 다시 확인해보자’고 하고, 집에서 제일 가까운 산부인과를 찾아갔습니다. 급히 찾느라 대충 후기 괜찮아보이고 여의사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갔어요. 함께 병원에 가서 초음파검사를 했는데 임신이 맞았습니다. 착상 시기는 2월 15일 전후, 임신 6주차였습니다.
3.첫 병원 방문기
일단 병원에서 확실하게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후다닥 나온 탓에 병원은 점심시간도 끝나지 않은 시간이었어요. 대기하며 병원 안을 둘러보니 의사는 나이가 꽤 있는 여자분인듯 하고, 신실해보였습니다. 계단과 로비에 큼지막하게 ‘우리 병원은 낙태 수술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써붙여놓았더군요. 자세히 둘러보니 예수 관련 나무 현판 등 교회와 관련한 장식품들이 보였습니다. 아직 접수만 하고 대기 중에 발견한 터라 지금이라도 나가서 다른 병원 갈까 싶었지만, 일단 들어왔으니 초음파만 보자는 마음으로 진료를 받았습니다. 의사는 첫 대면부터 같이 온 남성이 남편인지를 질문했고, 초음파를 하며 ‘아기집’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심장이 뛰면 아기가 건강한지 확인할 수 있는데 아직 심장이 뛰지 않는다며 일주일 뒤에 다시 오라고 하더군요.
병원에서 나온 뒤에 바로 있는 약국에서 같이 청심환 사서 먹었습니다. 진정하려고요.
일단 임신 여부 확인을 했으니 대화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으로 이동했습니다.
4.임신중절을 결정/두 번째 병원 방문
임신중절은 대화를 통해 결정했습니다. 제가 먼저 아무래도 수술을 해야하지 않겠냐고 제안했고요. 남자친구는 처음엔 혼란스러워 했지만 제 의사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중절하기로 했습니다.
인터넷으로 몇 가지 검색을 했고, 검색광고 상단에 뜨는 병원이 마침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어 바로 상담을 신청했습니다. 채팅으로 먼저 상담하고 통화를 했고요, 초음파 및 내원 상담이 필요하다고 하여 바로 두 번째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그 사이 토닥앱도 받아서 설치를 했고, 차로 이동하며 급한대로 후기들을 살펴보았어요. 생각보다 4-7주차에 수술받는 분들이 많았다는 점, 수술시간이 10분 내외로 짧고 수면마취로 기억하지 못하는 점, 통증이 생리통 정도라는 점 등을 보며 나름 위안을 얻었습니다. 다들 잘 해내고 버티고 회복하는데 나도 못할 것 없다는 용기도 얻고요. 평소 생리통이 거의 없는 편이라 통증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줄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접수할 때부터 ‘아까 전화하신 분’인지 여부를 확인했고요, 바로 의사에게 안내되었습니다. 초음파를 다시 했고, 간단하게 임신사실여부와 6주차라는 것을 확인해주었습니다. 중절여부를 확인하더니, 자세한 상담은 상담간호사와 하면된다고 안내하더군요. 상당히 심플한 진료였습니다.
바로 남자친구와 함께 상담을 진행했습니다. 다음날 오전으로 수술일시를 바로 잡고, 과정과 비용 안내를 들었습니다. 간호사는 자궁 모형 중, 자궁을 손으로 가리며 여기에 있는 ‘무언가’를 제거하는 수술이고, 약을 넣어서 1시간 반 정도 경부가 말랑해지면 수면마취 후 튜브를 넣고 자궁을 깨끗하게 한다, 출혈이 있을 수 있고 통증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생리통 정도일 것이라고 안내했습니다. 비용은 현금으로 90만원이고 수술날 수납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임신사실과 자궁 안의 ‘무언가’를 대하는 태도가 앞의 병원과 무척 다르고 조심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애초에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눈물이 나거나 윤리적 가책을 느끼진 않았는데요. 수많은 임신중절을 겪은 여성들이 사소한 단어 하나, 의료진들의 비언어적 태도 등으로부터 불안, 두려움, 자책감을 느끼기 쉽기 때문에 조심한다고 느껴졌습니다.
5.수술 전날 밤 마음의 준비
자정 이후로 금식을 해야했기 때문에 크게 준비할 것은 없었습니다. 수술전후로 잡혀있던 개인일정을 모두 캔슬해서 일정을 모두 비웠고요. 저녁엔 남자친구와 산책을 하며 대화를 더 나누었습니다.
남자친구는 연애 중 겪을 수 있는 큰 사건인데 우리가 이 주제로 미리 대화를 충분히 나누지 못했다고 반성했고요. 저도 앞으로는 경각심을 가지고 철저하게 피임하자고 맞장구 쳤습니다. 오히려 제가 너무 빨리 중절수술 결정을 해서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는 판단이 어려워서 머뭇거렸는데, 제가 밀어붙여서 따르게 되었다고요. 저는 평소에 낙태죄 관련한 기사나 SNS의 글을 보면서 생각해왔다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6주차에 알게되었고 둘 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도 말하고요. 주차가 너무 길어졌다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렇게 빨리 결심하고 행사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 외에 주변에 알릴지 여부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처음엔 알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남자친구는 구태여 알릴 필요 없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믿을 수 있는 지인이더라도 이건 제 사생활이고 듣는 사람이 당황할 것도 생각하면 상대방을 위해서라도 굳이 알릴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결정한 일에 대해서 과도하게 걱정해주거나 배려받는 것도 불편해질 것 같아서요. 물론 저는 남자친구와 충분한 대화를 통해 정서적으로 덜 불안하기 때문에 다른 존재가 필요하지 않다고 느낀 점이 큽니다.
특히 배와 뱃속에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의식적으로 죄책감이나 불안을 주는 생각은 피했어요. 라섹수술처럼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남자친구는 지금은 중절하지만 나중에 혹시 아기를 낳고싶은 생각으로 바뀌진 않을지, 나중이라도 그런 일이 또 생기면 결혼 여부는 어떻게 할지 물었고요. 저는 지금의 결정은 후회하지 않고, 나중에 당연히 생각이 바뀔 수는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앞으로도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다고 답했습니다. 결혼은 양가 원가정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으면 상관없고요. 제도가 중요한게 아니라, 정신적 물리적 자유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자친구도 전적으로 동의했고요.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내가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지금 남자친구와 헤어질 생각도 없고 당장 결혼할 생각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제 삶을 통제할 수 있고, 후회하지 않도록 충분히 고심해서 인생의 방향을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며 수술 전날 멘탈 케어 했습니다.
6.수술 당일/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떠 샤워와 양치를 했습니다. 전날 자정부터 금식인데 저녁먹고 자정 전에 물마시는걸 깜박해서 12시 10분에 물 한잔 마셨습니다. 아침에 샤워 양치하며 물마시기 대신 수분보충했고요.
막상 수술 당일이 되니 조금씩 불안해지긴 하더라고요. 정말 이 일이 나에게 벌어졌구나,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했구나, 많이 아프면 어떡하지 위험한 수술일텐데 등등. 전날 멘탈 케어한 것들을 다시금 떠올리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상담실에 먼저 가서 한 번 더 수술과정과 주의사항에 대해 안내받았습니다. 그 뒤 바로 환복하고 자궁경부를 넓혀주는 약을 삽입했습니다. 약 삽입은 초음파검사와 비슷하게 의자에 앉아서 진행했습니다. 삽입과정은 이물감이 느껴지긴 해도 전혀 아프진 않았어요.
그리고 회복실에서 남자친구와 한시간 반 가량 대기했습니다. 간호사가 와서 방 안에서 은밀하게 현금으로 수술비도 수납받더라고요. 대기하며 약때문에 배가 아플 수도 있다고 했는데 저는 하나도 안 아팠어요. 전기장판이 있어서 따땃했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나른하니 졸리기도 했고요. 약을 넣을 땐 잔뜩 긴장했는데, 회복실에 단 둘이 있으니 마음도 편해졌고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특히 점심 뭐먹을지 중요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인터넷에서 수술 이후에 단백질이 좋다고 해서 전복죽 먹기로 했어요. 제가 수술을 불안해하니까, 자기도 수면마취 해봤다고 정신없이 잔다고 안심시켜주고요.
수술대 위에서는 링거부터 꽃았습니다. 저는 오른팔에 먼저 바늘을 꽃았는데, 간호사가 잘못 놨는지 어쨌는지,, 수액이 안들어가서 빼고 좀 더 노련한 다른 간호사가 와서 왼팔에 다시 바늘 꽃았습니다. 제가 오른팔에 바늘구멍 두개 뚫기 싫어서 왼팔에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평소에 주사바늘 무서워해서 숨을 짧게 후 후 했더니, 한숨쉬듯이 크게 호흡하라고 간호사가 말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요가하듯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또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바늘 꽃으며 팔다리도 묶고요. 그리고 바로 의사가 들어와서 인사하고, 소독했는데 어느새 잠들었어요. 깨워서 일어나니 수술이 끝났고 회복실로 이동하랍니다. 잠에서 덜 깨서 정신이 혼미했지만, 배나 질에 통증이나 불편함은 딱히 없었어요.
회복실에서는 수액맞으면서 남자친구한테 수술썰풀고, 잠에서 덜 깨서 음냐음냐 헛소리 하다보니 시간이 훌쩍 갔고요. 간호사가 다시 와서 집에 가라고 하더라고요. 따뜻하고 나른해서 좀 더 있으면 안되냐고 칭얼댔더니, 병원 점심시간이라네요ㅎㅎ;;
집에 가는 길엔 졸리고 피곤해서 몽롱하게 눈 감고 쉬었습니다. 자차로 이동했고요. 집에 도착하고는 바로 침대에 뻗었습니다. 남자친구가 바로 죽 사와서 먹으러 다시 일어났고요. 전반적으로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이 축 쳐진 상태였어요. 생리할 때처럼 팬티가 축축해지는 느낌도 들고요. 숟가락 들 힘도 없어서 처음엔 깨작깨작 먹다가, 죽이 맛있어서 갑자기 기운이 생겼습니다. 싹싹 비우고 약먹고 다시 누워서 전기장판에 배 지졌어요. 정신을 다른 데에 집중하고 싶어서 유튜브에서 생각없이 볼 수 있는 예능프로 몇 개 봤습니다. 메인에 금쪽이가 떠서 보다가 갑자기 ‘내가 이와중에 왜 이걸..’ 현타가 와서 끄고 채널 돌렸어요. 평소에 금쪽이 자극적인 예능프로라 정신없이 보는데, 앞으로는 슈돌이나 금쪽이같은 프로그램은 마음이 불편할 수 있겠더라고요.
낮잠도 한두시간 자고, 저녁은 남자친구가 미역국에 생선구이 해줘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맛있더라고요.. 기운이 좀 생겨서 일상생활이 어느정도 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요리, 청소나 설거지처럼 귀찮은 일은 남자친구가 다 해줬어요.
출혈은 수술 후 두시간 뒤에 한 번, 또 두시간 뒤에 한 번 갈고 그 다음은 네다섯시간 뒤에 자기 전에 갈았습니다. 생리 이틀차 수준으로 나온다더니, 첫 생리대만 좀 피가 나오고 두번째 세번째부터는 색이 점점 연해지고 양도 조금씩 줄었습니다.
잠 잘자고 밥 잘먹고 출혈도 정상적으로 나오고 배도 생리통처럼 살살 아픈게 딱 병원에서 말해준 대로였습니다. 괴롭다기보다는 예측범위 내로 증상이 나타나니까 내가 잘 회복하고 있구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둘째날 컨디션은 훨씬 좋아졌고요. 병원가서 한번 더 진료(초음파+소독+연고)받으니, 이상소견없고 일주일 뒤에 오라더군요.
7.마무리
임신 사실을 알고 24시간 이내에 중절수술까지 마쳤습니다. 낙태죄가 합법이라곤 하지만, 아직 관련 정책이 뒤따르지 않아서 현장은 굉장히 음성적인 것 같았어요. 검색도 어렵고 정보도 충분하지 않고요. 토닥같은 앱이 아니었다면 이 과정이 더 힘들었을텐데, 여기서 정말 많은 정보와 도움 얻었습니다.
인생에 있을 수 있는 일이 벌어졌고, 나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성들이 경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정신적으로 버텼어요. 일어나지 않으면 더 좋았을 일이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어쩔 수 없고, 침착하게 대응하려고 노력했고요. 전혀 후회하지 않고, 앞으로 일주일정도는 더 회복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모두 힘내세요.
1.신상정보/연애와 결혼에 대한 평소 생각
저는 30대 초반이고, 남자친구는 30대 초중반이에요. 만난지 만 4년이고 만 4년동안 쭉 동거해왔습니다. 만나자마자 같이 살기 시작했는데, 직장과 경제적인 이유로 별 고민없이 생활이 합쳐진 케이스고요. 서로 배려하며 문제없이 잘 살고있었습니다.
나이도 있고 같이 사는 것도 맞으니 결혼도 생각했으리라 보실 수도 있는데요. 남들이 보기엔 이미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저희는 결혼제도에 묶이고 싶지 않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상하게 보실 수도 있는데요. 독립된 개인으로서 일과 생활 등을 원가정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저희에게는 정서적으로 큰 안정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둘 다 사고방식이 유연하고 개방적인 편입니다. 남자친구와 이 주제로 구체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저는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에도 전적으로 동의해왔고요. SNS 상의 낙태죄 해시태그 운동을 팔로업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이라는 마음의 준비를 해왔던 것 같습니다.
2.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마지막 생리는 2월 초로 기억하고요. 평소 생리주기가 불규칙해서 조금 늦어져도 크게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피임은 콘돔으로 해왔고요. 생리가 너무 늦어지면 임테기를 했고 늘 음성이었습니다. 이번에는 3월 초에 생리를 해야 했지만, 조금 늦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고요. 3월 2주차에 코로나에 확진되면서 많이 아팠기 때문에 코로나때문에 늦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코로나라도 한 달이나 늦어지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되어 3월 28일에 임테기를 해보니 선명하게 두 줄이 나왔습니다.
임테기는 유통기한이 약 5개월 지난 것이었고, 첫 소변도 아니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샤워를 하러 들어가서 바로 테스트를 한 거라, 머리가 하얘진 채로 일단 씻었습니다.
씻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는데요. 가장 크게는 위의 조건(유통기한, 첫소변x)으로 결과값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과 만일 임신이더라도 낳아서 기를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남자친구는 장기휴가, 저는 휴직기라 집에 같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가서 임테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남자친구는 너무 놀라며 당황했고, 저는 정신 차리라고 했습니다. ‘멘탈챙기고 일단 병원으로 가서 다시 확인해보자’고 하고, 집에서 제일 가까운 산부인과를 찾아갔습니다. 급히 찾느라 대충 후기 괜찮아보이고 여의사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갔어요. 함께 병원에 가서 초음파검사를 했는데 임신이 맞았습니다. 착상 시기는 2월 15일 전후, 임신 6주차였습니다.
3.첫 병원 방문기
일단 병원에서 확실하게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후다닥 나온 탓에 병원은 점심시간도 끝나지 않은 시간이었어요. 대기하며 병원 안을 둘러보니 의사는 나이가 꽤 있는 여자분인듯 하고, 신실해보였습니다. 계단과 로비에 큼지막하게 ‘우리 병원은 낙태 수술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써붙여놓았더군요. 자세히 둘러보니 예수 관련 나무 현판 등 교회와 관련한 장식품들이 보였습니다. 아직 접수만 하고 대기 중에 발견한 터라 지금이라도 나가서 다른 병원 갈까 싶었지만, 일단 들어왔으니 초음파만 보자는 마음으로 진료를 받았습니다. 의사는 첫 대면부터 같이 온 남성이 남편인지를 질문했고, 초음파를 하며 ‘아기집’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심장이 뛰면 아기가 건강한지 확인할 수 있는데 아직 심장이 뛰지 않는다며 일주일 뒤에 다시 오라고 하더군요.
병원에서 나온 뒤에 바로 있는 약국에서 같이 청심환 사서 먹었습니다. 진정하려고요.
일단 임신 여부 확인을 했으니 대화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으로 이동했습니다.
4.임신중절을 결정/두 번째 병원 방문
임신중절은 대화를 통해 결정했습니다. 제가 먼저 아무래도 수술을 해야하지 않겠냐고 제안했고요. 남자친구는 처음엔 혼란스러워 했지만 제 의사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중절하기로 했습니다.
인터넷으로 몇 가지 검색을 했고, 검색광고 상단에 뜨는 병원이 마침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어 바로 상담을 신청했습니다. 채팅으로 먼저 상담하고 통화를 했고요, 초음파 및 내원 상담이 필요하다고 하여 바로 두 번째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그 사이 토닥앱도 받아서 설치를 했고, 차로 이동하며 급한대로 후기들을 살펴보았어요. 생각보다 4-7주차에 수술받는 분들이 많았다는 점, 수술시간이 10분 내외로 짧고 수면마취로 기억하지 못하는 점, 통증이 생리통 정도라는 점 등을 보며 나름 위안을 얻었습니다. 다들 잘 해내고 버티고 회복하는데 나도 못할 것 없다는 용기도 얻고요. 평소 생리통이 거의 없는 편이라 통증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줄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접수할 때부터 ‘아까 전화하신 분’인지 여부를 확인했고요, 바로 의사에게 안내되었습니다. 초음파를 다시 했고, 간단하게 임신사실여부와 6주차라는 것을 확인해주었습니다. 중절여부를 확인하더니, 자세한 상담은 상담간호사와 하면된다고 안내하더군요. 상당히 심플한 진료였습니다.
바로 남자친구와 함께 상담을 진행했습니다. 다음날 오전으로 수술일시를 바로 잡고, 과정과 비용 안내를 들었습니다. 간호사는 자궁 모형 중, 자궁을 손으로 가리며 여기에 있는 ‘무언가’를 제거하는 수술이고, 약을 넣어서 1시간 반 정도 경부가 말랑해지면 수면마취 후 튜브를 넣고 자궁을 깨끗하게 한다, 출혈이 있을 수 있고 통증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생리통 정도일 것이라고 안내했습니다. 비용은 현금으로 90만원이고 수술날 수납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임신사실과 자궁 안의 ‘무언가’를 대하는 태도가 앞의 병원과 무척 다르고 조심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애초에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눈물이 나거나 윤리적 가책을 느끼진 않았는데요. 수많은 임신중절을 겪은 여성들이 사소한 단어 하나, 의료진들의 비언어적 태도 등으로부터 불안, 두려움, 자책감을 느끼기 쉽기 때문에 조심한다고 느껴졌습니다.
5.수술 전날 밤 마음의 준비
자정 이후로 금식을 해야했기 때문에 크게 준비할 것은 없었습니다. 수술전후로 잡혀있던 개인일정을 모두 캔슬해서 일정을 모두 비웠고요. 저녁엔 남자친구와 산책을 하며 대화를 더 나누었습니다.
남자친구는 연애 중 겪을 수 있는 큰 사건인데 우리가 이 주제로 미리 대화를 충분히 나누지 못했다고 반성했고요. 저도 앞으로는 경각심을 가지고 철저하게 피임하자고 맞장구 쳤습니다. 오히려 제가 너무 빨리 중절수술 결정을 해서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는 판단이 어려워서 머뭇거렸는데, 제가 밀어붙여서 따르게 되었다고요. 저는 평소에 낙태죄 관련한 기사나 SNS의 글을 보면서 생각해왔다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6주차에 알게되었고 둘 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도 말하고요. 주차가 너무 길어졌다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렇게 빨리 결심하고 행사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 외에 주변에 알릴지 여부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처음엔 알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남자친구는 구태여 알릴 필요 없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믿을 수 있는 지인이더라도 이건 제 사생활이고 듣는 사람이 당황할 것도 생각하면 상대방을 위해서라도 굳이 알릴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결정한 일에 대해서 과도하게 걱정해주거나 배려받는 것도 불편해질 것 같아서요. 물론 저는 남자친구와 충분한 대화를 통해 정서적으로 덜 불안하기 때문에 다른 존재가 필요하지 않다고 느낀 점이 큽니다.
특히 배와 뱃속에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의식적으로 죄책감이나 불안을 주는 생각은 피했어요. 라섹수술처럼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남자친구는 지금은 중절하지만 나중에 혹시 아기를 낳고싶은 생각으로 바뀌진 않을지, 나중이라도 그런 일이 또 생기면 결혼 여부는 어떻게 할지 물었고요. 저는 지금의 결정은 후회하지 않고, 나중에 당연히 생각이 바뀔 수는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앞으로도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다고 답했습니다. 결혼은 양가 원가정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으면 상관없고요. 제도가 중요한게 아니라, 정신적 물리적 자유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자친구도 전적으로 동의했고요.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내가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지금 남자친구와 헤어질 생각도 없고 당장 결혼할 생각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제 삶을 통제할 수 있고, 후회하지 않도록 충분히 고심해서 인생의 방향을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며 수술 전날 멘탈 케어 했습니다.
6.수술 당일/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떠 샤워와 양치를 했습니다. 전날 자정부터 금식인데 저녁먹고 자정 전에 물마시는걸 깜박해서 12시 10분에 물 한잔 마셨습니다. 아침에 샤워 양치하며 물마시기 대신 수분보충했고요.
막상 수술 당일이 되니 조금씩 불안해지긴 하더라고요. 정말 이 일이 나에게 벌어졌구나,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했구나, 많이 아프면 어떡하지 위험한 수술일텐데 등등. 전날 멘탈 케어한 것들을 다시금 떠올리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상담실에 먼저 가서 한 번 더 수술과정과 주의사항에 대해 안내받았습니다. 그 뒤 바로 환복하고 자궁경부를 넓혀주는 약을 삽입했습니다. 약 삽입은 초음파검사와 비슷하게 의자에 앉아서 진행했습니다. 삽입과정은 이물감이 느껴지긴 해도 전혀 아프진 않았어요.
그리고 회복실에서 남자친구와 한시간 반 가량 대기했습니다. 간호사가 와서 방 안에서 은밀하게 현금으로 수술비도 수납받더라고요. 대기하며 약때문에 배가 아플 수도 있다고 했는데 저는 하나도 안 아팠어요. 전기장판이 있어서 따땃했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나른하니 졸리기도 했고요. 약을 넣을 땐 잔뜩 긴장했는데, 회복실에 단 둘이 있으니 마음도 편해졌고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특히 점심 뭐먹을지 중요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인터넷에서 수술 이후에 단백질이 좋다고 해서 전복죽 먹기로 했어요. 제가 수술을 불안해하니까, 자기도 수면마취 해봤다고 정신없이 잔다고 안심시켜주고요.
수술대 위에서는 링거부터 꽃았습니다. 저는 오른팔에 먼저 바늘을 꽃았는데, 간호사가 잘못 놨는지 어쨌는지,, 수액이 안들어가서 빼고 좀 더 노련한 다른 간호사가 와서 왼팔에 다시 바늘 꽃았습니다. 제가 오른팔에 바늘구멍 두개 뚫기 싫어서 왼팔에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평소에 주사바늘 무서워해서 숨을 짧게 후 후 했더니, 한숨쉬듯이 크게 호흡하라고 간호사가 말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요가하듯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또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바늘 꽃으며 팔다리도 묶고요. 그리고 바로 의사가 들어와서 인사하고, 소독했는데 어느새 잠들었어요. 깨워서 일어나니 수술이 끝났고 회복실로 이동하랍니다. 잠에서 덜 깨서 정신이 혼미했지만, 배나 질에 통증이나 불편함은 딱히 없었어요.
회복실에서는 수액맞으면서 남자친구한테 수술썰풀고, 잠에서 덜 깨서 음냐음냐 헛소리 하다보니 시간이 훌쩍 갔고요. 간호사가 다시 와서 집에 가라고 하더라고요. 따뜻하고 나른해서 좀 더 있으면 안되냐고 칭얼댔더니, 병원 점심시간이라네요ㅎㅎ;;
집에 가는 길엔 졸리고 피곤해서 몽롱하게 눈 감고 쉬었습니다. 자차로 이동했고요. 집에 도착하고는 바로 침대에 뻗었습니다. 남자친구가 바로 죽 사와서 먹으러 다시 일어났고요. 전반적으로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이 축 쳐진 상태였어요. 생리할 때처럼 팬티가 축축해지는 느낌도 들고요. 숟가락 들 힘도 없어서 처음엔 깨작깨작 먹다가, 죽이 맛있어서 갑자기 기운이 생겼습니다. 싹싹 비우고 약먹고 다시 누워서 전기장판에 배 지졌어요. 정신을 다른 데에 집중하고 싶어서 유튜브에서 생각없이 볼 수 있는 예능프로 몇 개 봤습니다. 메인에 금쪽이가 떠서 보다가 갑자기 ‘내가 이와중에 왜 이걸..’ 현타가 와서 끄고 채널 돌렸어요. 평소에 금쪽이 자극적인 예능프로라 정신없이 보는데, 앞으로는 슈돌이나 금쪽이같은 프로그램은 마음이 불편할 수 있겠더라고요.
낮잠도 한두시간 자고, 저녁은 남자친구가 미역국에 생선구이 해줘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맛있더라고요.. 기운이 좀 생겨서 일상생활이 어느정도 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요리, 청소나 설거지처럼 귀찮은 일은 남자친구가 다 해줬어요.
출혈은 수술 후 두시간 뒤에 한 번, 또 두시간 뒤에 한 번 갈고 그 다음은 네다섯시간 뒤에 자기 전에 갈았습니다. 생리 이틀차 수준으로 나온다더니, 첫 생리대만 좀 피가 나오고 두번째 세번째부터는 색이 점점 연해지고 양도 조금씩 줄었습니다.
잠 잘자고 밥 잘먹고 출혈도 정상적으로 나오고 배도 생리통처럼 살살 아픈게 딱 병원에서 말해준 대로였습니다. 괴롭다기보다는 예측범위 내로 증상이 나타나니까 내가 잘 회복하고 있구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둘째날 컨디션은 훨씬 좋아졌고요. 병원가서 한번 더 진료(초음파+소독+연고)받으니, 이상소견없고 일주일 뒤에 오라더군요.
7.마무리
임신 사실을 알고 24시간 이내에 중절수술까지 마쳤습니다. 낙태죄가 합법이라곤 하지만, 아직 관련 정책이 뒤따르지 않아서 현장은 굉장히 음성적인 것 같았어요. 검색도 어렵고 정보도 충분하지 않고요. 토닥같은 앱이 아니었다면 이 과정이 더 힘들었을텐데, 여기서 정말 많은 정보와 도움 얻었습니다.
인생에 있을 수 있는 일이 벌어졌고, 나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성들이 경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정신적으로 버텼어요. 일어나지 않으면 더 좋았을 일이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어쩔 수 없고, 침착하게 대응하려고 노력했고요. 전혀 후회하지 않고, 앞으로 일주일정도는 더 회복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모두 힘내세요.
